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1세 (문단 편집) === [[이탈리아 전쟁|대(對) 합스부르크 전쟁]]과 국가재정 === 프랑수아 1세는 2m에 달하는 장대한 체구의 소유자였을 뿐 아니라 스포츠로 다져진 튼튼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. 1520년, 프랑수아 1세는 프랑스 북부의 발링헴 지역에서 [[잉글랜드 왕국|잉글랜드]]의 [[튜더 왕조]] 제2대 왕 [[헨리 8세]]와 만나 회담을 가졌다. 양국의 자존심을 걸고 화려하게 꾸미느라 [[돈지랄]]이 난 이 발링헴 회담에서 프랑수아 1세와 헨리 8세는 우의를 다지는 차원에서 [[레슬링]] 시합을 가졌는데, 헨리가 프랑수아에게 완패하는 치욕을 당했다. 프랑수아 1세가 젊은 시절에 [[브르타뉴]] 지역의 레슬링 선수들한테 레슬링을 배웠기 때문에 그 자신도 뛰어난 레슬링 실력을 지닌데다 헨리 8세(188cm)보다도 키가 훨씬 더 컸다. 레슬링 실력이 뛰어난데다 키와 체격까지 더 컸으니 당연히 헨리 8세가 질 수 밖에. 다만 프랑수아 1세는 이 회담을 통해 헨리 8세와 손을 잡고 [[신성 로마 제국 황제]] [[카를 5세]]를 견제하려 했으나, 헨리 8세는 도리어 전쟁을 피하고,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의 관계를 중재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.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엄청난 돈을 들인 이 회담에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. 프랑스 국왕으로서 그의 삶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[[스페인 국왕]]으로서 당시 [[합스부르크 가문|합스부르크 왕조]]의 최강기를 구가하던 [[카를 5세]]와의 [[이탈리아 전쟁]]으로 점철되었다. 처음엔 선왕 [[루이 12세]]가 실패했던([[이탈리아 전쟁#s-2.1.3|제3차 이탈리아 전쟁]]) 이탈리아 침공에 나서 초기 [[마리냐노 전투]](1515)에서 [[스위스 용병]]대를 물리쳤으나 곧 [[스페인군]]에 밀려 패퇴했고, 동맹자였던 [[교황]] [[클레멘스 7세]]는 [[란츠크네히트|독일 용병단]]에 의해 [[사코 디 로마|로마가 쑥대밭이 되자]] 카를 5세편으로 돌아섰다. 그로 인해 [[이탈리아 반도]]의 패권 역시 스페인 손에 넘어갔다. 그 후의 [[이탈리아 전쟁#s-2.1.4|제4차 이탈리아 전쟁]](1521~1526)에서도 밀려, 1525년 2월 [[파비아 전투]]에서 프랑수아 1세가 직접 참전하는 친정에 나섰으나 오히려 대패하였고 한때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었다. 프랑수아 1세와 프랑스에게는 일대의 치욕적인 굴욕이었으나 [[스페인]] 입장에서는 최고의 전성기였다.[* 그 후 [[카를 5세]]의 포로로 잡혔다가 아들 둘을 볼모로 보낸 조건으로 프랑수아 1세가 프랑스로 돌아온 후, 발루아-앙굴렘 왕조 프랑스와 [[압스부르고 왕조|합스부르크 왕조]] 스페인은 캉브레 조약을 체결했다. 이 조약에 따라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게 인질로 잡혀 있던 두 아들들을 돌려받았고, 카를 5세가 [[부르고뉴]]를 포기하는 대신 프랑스는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모든 소유지와 아르투아 지방, [[플랑드르]] 지방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. 또한 배상금 200만 크라운을 지불했는데 1차분으로 넘긴 120만 크라운을 헤아리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는 배상금 덕에 스페인 국고는 금화로 넘친 반면 프랑스는 초긴축 기조를 강요받았다. 이 때문에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와 신성 로마 제국을 평생 증오했다. 여담으로 이 캉브레 조약은 "마담들의 평화"라는 이명으로 불리는데,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와 카를 5세의 고모 [[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]]가 협상을 벌였기 때문.] 이처럼 프랑수아 1세는 당대의 평가와 같이 "전쟁에서도 외교에서도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군주"였다. 1525년 [[파비아 전투]]에서 라이벌 카를 5세에게 크게 패하고 생포되어 포로 생활을 하는 등 씻기 어려운 치욕을 겪었고, 말년까지 이탈리아에서 카를 5세와 대립했지만 결국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밀려나고 말았다. [[파일:suleiman.karl.jpg|width=660]] 프랑수아 1세(좌)와 [[쉴레이만 1세]] 자신이 직접 나선 전쟁에서 참패하고 포로가 된 치욕으로 인해 카를 5세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한 때문인지 틈만 나면 카를 5세와 신성 로마 제국에게 복수하려고 들었다. [[이탈리아 전쟁#s-2.1.6|제6차 이탈리아 전쟁]](1536~1538)때는 [[이슬람교]]를 믿는 [[오스만 제국]]과 손을 잡고 카를 5세에게 대항하려 하기도 했지만, 큰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[[유럽]] 국가들의 비난만 샀다. 특히 [[이탈리아 전쟁#s-2.1.7|제7차 이탈리아 전쟁]](1542~1546)때는 악명 높은 오스만의 해적 겸 해군 제독인 [[하이르 앗 딘|바르바로사 하이레딘 파샤]]가 이끄는 함대가 프랑수아 1세의 허가를 받아 1543년 프랑스 남부 [[툴롱]]에 정박하고, [[니스|니차]] 등 이탈리아 해안 등을 공격하자 유럽 각국에서 교황에게 프랑수아 1세를 파문시켜야 한다는 소리가 빗발쳤다.[* 사실 프랑수아 1세와 대립하던 카를 5세 역시 동맹까지는 아니지만 페르시아의 [[시아파]] [[사파비 왕조]]와 나름대로 접촉하며 프랑스와 [[수니파]]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다. 다만 오늘날에는 기독교 유럽 국가가 사상 처음으로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고 맺은 군사동맹이라는 이유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. 물론 이 역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본 억지춘향식 결과주의적 해석이라 타당한 평은 아니다.] 더구나 [[카를 5세]]의 고모인 [[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]]와도 여러모로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. 프랑수아 1세가 노른자 땅인 [[부르고뉴 공국]]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을 때 당시 [[스페인 제국]]의 국왕이 되기 위해 떠난 조카 카를 5세를 대신하여 [[부르고뉴 공국]][* 부르고뉴 공국이라고 하지만 사실 이미 부르고뉴 본토는 프랑스 왕령에 흡수된 상태였고 [[홀란트]], [[플랑드르]], [[브라반트]]와 같이 부르고뉴와 [[동군연합]]으로 묶여있던 [[저지대 국가]]를 통치하고 있었다.]을 대리 통치하고 있었던 마르가레테가 이를 저지한 바 있었고, [[신성 로마 제국]]의 선출 제위를 놓고 프랑수아 1세가 카를 5세와 경쟁할 때도 그녀의 계책으로 거부 푸거 가문의 자산이 대거 융통되어 [[카를 5세]]의 이름으로 [[뇌물|선제후들에게 뿌려졌다.]]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는 카를 5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. [[스페인 제국]]에게 질 수 없다는 듯 프랑수아 1세는 [[아메리카]] 신대륙에도 관심을 가져 [[자크 카르티에]]를 파견해 [[캐나다]]를 탐험하게 하기도 했다. 잦은 원정과 실패, 건축, 배상금 등으로 프랑스의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고, 왕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으며 그저 관직매매를 통해 임시변통을 했을 뿐이었다. [[앙시앵 레짐]]의 병폐 중 하나인 [[매관매직|관직매매]]와 [[징세청부업자|징세권 매매]]는 이 시기에 악화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